[홍광훈의 산인만필(散人漫筆) <50> ‘한(恨)’에 관한 산만(散漫)한 이야기] 인생이란 길이 한스럽고 물은 길이 동쪽으로 흘러가나니
[홍광훈의 산인만필(散人漫筆) <50> ‘한(恨)’에 관한 산만(散漫)한 이야기] 인생이란 길이 한스럽고 물은 길이 동쪽으로 흘러가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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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가슴에 크고 작은 한을 안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대중은 오늘도 삶을 위해 바삐 움직인다. 용문역 앞 오일장의 한쪽 모습. /홍광훈
지난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게 느껴졌다. 그 인고(忍苦) 끝에 환희의 봄날이 오나 했더니 어느새 지나가 버렸다.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 남당(南唐)의 망국 군주 이욱(李煜)은 ‘상견환(相見歡)’이란 짧은 곡조의 사로 이런 아쉬움을 애절하게 노래했다.“숲속 송이송이 꽃에 봄의 붉은 빛 시들었다. 너무나 빨리도 지나가는구나. 거기에 아침나절 찬비와 저녁 바람을 어찌하려나(林花謝了春紅. 太匆匆. 無奈朝來寒雨晚來風). 연지 같은 꽃잎에 맺힌 눈물, 나를 머물러 취하게 하는데, 어느 때나 다시 피려오? 신용회복방법
원래 인생이란 길이 한스럽고 물은 길이 동쪽으로 흘러가나니(胭脂淚, 相留醉, 幾時重. 自是人生長恨水長東).”짧은 봄날에 대한 석별의 정을 동쪽으로 길게 흘러가는 장강(長江)처럼 끝없는 인생의 한과 절묘하게 대비(對比)시키고 있다. ‘짧은 봄날’은 인생의 꽃다운 시절을 상징하기도 한다. ‘장한(長恨)’은 양귀비(楊貴妃)와 현종(玄宗)의 애절한 사연을 담은 백예가람
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를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홍광훈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북송(北宋아르바이트 야간수당
) 말의 진관(秦觀·1049~1100)도 이욱 같은 감성파의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봄날의 이러한 애상(哀傷)을 남녀의 사랑과 묶어 ‘강성자(江城子)’란 곡조로 표현했다.“서쪽 성 밖 버들은 봄날의 부드러운 가지 흔들어, 이별의 수심 건드리니, 눈물 거두기 어려워라. 아직도 마음속에 새겨진 따뜻한 정이건만, 일찍이 돌아갈 배 묶어두었다네. 푸른 들 붉은 다제2금융권아파트추가대출
리에 지난 사연 남았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고, 물만 헛되이 흘러가누나(西城楊柳弄春柔. 動離憂. 淚難收. 猶記多情, 曾爲繫歸舟. 碧野朱橋當日事, 人不見, 水空流). 아름다운 시절은 젊은이 위해 머물지 않아, 끝없는 이 한, 언제나 그치려나? 솜털 날리고 꽃잎 떨어질 때 누각에 오르니, 봄 강은 모두 눈물로 변해버렸다. 그래도 다 흘려보내지 못하리니, 이 많소액대출쉬운곳
은 근심을(韶華不爲少年留. 恨悠悠. 幾時休. 飛絮落花時候一登樓. 便做春江都是淚, 流不盡, 許多愁).”이런 일이 젊을 때는 더없이 큰 한이 되기도 한다. 세월이 지나 많은 세상 경험 뒤에 돌이켜보면 그렇게 대수롭지도 않을 일을 두고, 한때의 고통을 참지 못해 돌이킬 수 없는 섣부른 짓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밤낮으로 나라 걱정에 마음 졸이며 울분을 토하던여자 직장인 쇼핑몰
남송(南宋) 초의 신기질(辛棄疾)도 혈기 왕성한 시절에는 그런 일이 있었다. ‘염노교(念奴嬌)’란 곡조의 작품을 보면, 그가 나이 들어서도 그 추억이 가슴 한쪽에 한으로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팥배 꽃 떨어지며 또다시 급하게 지나간 청명 시절. 난데없이 불어오는 동쪽 바람이 나그네 꿈을 깨워, 운모 병풍 앞 외로운 베개만 차갑다. 굽은 강가에서 잔을구매전용카드
잡고, 수양버들에 말 묶어 놓은 바로 이곳에서, 그때는 너무 쉽게 헤어졌었지. 사람 떠난 빈 누각에 오르니, 지난날 노닐던 추억을 하늘 나는 제비가 말할 수 있으려나(野棠花落, 又匆匆過了,淸明時節. 剗地東風欺客夢, 一枕雲屏寒怯. 曲岸持觴, 垂楊繫馬, 此地曾輕別. 樓空人去, 舊遊飛燕能說). 아름다운 저 거리 동쪽에서, 지나는 이들이 두고두고 보았다 하네, 별내지구kcc
주렴 아래의 곱고 고운 달을. 묵은 한을 봄 강물이 다 흘려보내지 못했는데, 새 한은 구름 산이 천 겹이나 쌓인 듯. 내일 아침 술잔 앞에서 다시 보더라도, 거울 속 꽃처럼 꺾기 어려우리. 그리고 또 놀라며 물어볼 테지, 요즘 흰머리가 얼마나 났느냐고(聞道綺陌東頭, 行人長見, 簾底纖纖月. 舊恨春江流不斷, 新恨雲山千疊. 料得明朝, 樽前重見, 鏡裏花難折. 也應만기일시상환연장
驚問, 近來多少華髮).”인생에서 한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남의 눈에 행복하게만 보이는 사람에게도 알고 보면 말 못 할 한이 있다. 남에게는 하찮은 일도 당사자의 가슴속에서는 평생의 한으로 남기도 한다.당(唐) 말기의 진도옥(秦韜玉)은 ‘빈녀(貧女)’라는 율시(律詩)로 한 가난한 집 처녀의 가여운 모습을 애처롭게 묘사한 적이 있다.“가난한 집에서는 저축은행 대환
비단 향기 알지 못해, 좋은 중매 부탁하려 해도 제 가슴만 더 상할 뿐. 누가 풍류 가득한 높은 격조 사랑하리요, 모두가 세속에서 유행하는 화장만 좋아한다오. 열 손가락으로 바느질 솜씨 자랑하지만, 두 눈썹 길게 그리기는 다투지 않는답니다. 괴롭고 한스럽기로는 해마다 금색 실로 수를 놓지만, 그저 남을 위해 시집갈 옷 만든다오(蓬門未識綺羅香, 擬託良媒益自傷. 誰愛風流高格調, 共憐時世儉梳妝. 敢將十指夸針巧, 不把雙眉闘畫長. 苦恨年年壓金線, 爲他人作嫁衣裳).”여기에는 학식과 능력이 뛰어나고 품격 또한 빼어나지만 알아주는 이 없어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작자 자신의 한스러운 신세가 투영(投影)됐다고도 볼 수 있다.‘별부(別賦)’로 유명한 남북조시대 남조의 강엄(江淹·444~505)은 ‘한부(恨賦)’에서 여섯 명의 역사 인물로 다양한 한을 살펴보았다.진시황(秦始皇)은 천하 통일을 이룬 지존의 자리에서도 50세를 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나, “하루아침에 혼이 끊어져, 궁중의 수레도 늦게 나온다(一旦魂斷, 宮車晩出)”는 한을 남겼다.조(趙)의 망국 군주 조천(趙遷)은 나라와 부귀영화를 모두 잃고 포로가 된 뒤 방릉(房陵)이란 낯선 벽촌에 유폐됐다. “술을 놓고 마시려 해도 슬픔이 몰려와 가슴을 메웠으니, 천추만대가 지나도 그 원통함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置酒欲飲, 悲來塡膺. 千秋萬歲, 爲怨難勝)”이다. 참고로 부언하면, 그는 적국의 간첩이 된 간신 곽개(郭開)에게 속아 나라의 기둥인 장군 이목(李牧)을 죽게 한 장본인이다. ‘회남자(淮南子)’의 ‘태족훈(泰族訓)’ 편에는 그가 고향 산천을 그리워하는 노래 ‘산수지구(山水之謳)’를 지어 부르자 듣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당 후기의 호증(胡曾)은 칠언율시로 된 ‘영사시(詠史詩)’ 150수 중 ‘방릉’ 편에서 그 한을 이렇게 적었다. “조왕이 하루아침에 방릉으로 가니, 나라가 깨어지고 집안은 망해 백 가지 한이 쌓였다. 혼이 끊어져 총대에는 돌아갈 수 없거늘, 간밤의 밝은 달은 누굴 위해 떴던가(趙王一旦到房陵, 國破家亡百恨增. 魂斷叢臺歸不得, 夜來明月爲誰升).” ‘총대’는 조왕이 도성 한단(邯鄲)에서 열병 등 여러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다.전한(前漢)의 이릉(李陵)은 장군 이광(李廣)의 손자로 흉노와 전투 중 중과부적의 부득이한 상황에서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일단 투항했다. 그 뒤 사신으로 와서 억류돼 있던 소무(蘇武)는 19년의 고초 끝에 귀환했지만, 그는 이민족의 땅에서 생을 마쳐야 했으니, 그 한이 어떠했겠는가?왕소군(王昭君) 또한 흉노와 화친을 위한 정략결혼의 희생자로서, 초원에 보내졌다가 마침내 먼 이역에서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후한(後漢) 초의 풍연(馮衍)은 재주와 능력이 뛰어났음에도 모함을 당해 중용되지 못하고 내쳐졌다. 향리로 돌아간 그는 여생을 울분 속에서 불우하게 보내야 했다. 그 가슴속 한을 ‘현지부(顯志賦)’라는 문장으로 남겼다.죽림칠현(竹林七賢)의 중심인물 혜강(嵇康)은 무도한 권력자의 핍박으로 옥에 갇힌 뒤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었다.이 문장의 서두에서 강엄은 “옛일들을 생각해 보면, 모두가 한을 품고 죽었다(直念古者, 伏恨而死)”고 탄식했다. 말미에서도 “예부터 모두에게 죽음이 있으니, 한을 마시고 소리를 삼키지 않은 사람이 없다(自古皆有死, 莫不飲恨而吞聲)”고 마무리하고 있다.후대에 이백(李白)의 ‘의한부(擬恨賦)’처럼 이 문장을 모방한 작품이 더러 지어졌다. 조선(朝鮮)에서는 이려(李膂)와 신광한(申光漢)의 ‘속의한부(續擬恨賦)’와 조보양(趙普陽)의 ‘의한부(擬恨賦)’ 등이 나왔다.강엄 같은 작가가 오늘날 이 땅에 있다면, 과연 어떤 이의 한을 가장 비장하고 처절하게 서술할 것인가.지금 이 순간에도 대중은 각자 가슴속에 저마다의 한을 품고 있겠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자칫 경솔한 판단으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나라의 한’을 남기는 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이다. 이 중차대한 시기를 맞아 ‘한 번 발을 헛디디면 천고의 한이 된다(一失足成千古恨)’는 중국어를 ‘한 번 손을 잘못 놀리면 국가의 한이 된다(一失手成國家恨)’고 바꾸어 보았다. ‘나라의 흥망에는 필부도 책임이 있다(國家興亡, 匹夫有責)’는 말대로, 이 어찌 아니 두려운가!